국민대학교

교수님의 서재

Episode 12. 박길용 교수님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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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책 이야기 Title Bar

나에게 서재는 10평 이다

저에게 서재는 10평입니다. 학교에서 10평의 연구실 공간은 표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수는 그 속에서 벌어질 연구나 작업 내용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일률적인 10평을 하나씩 받는 겁니다. 이 10평짜리는 폭이 4m에 깊이가 8m 정도이니 1:2의 깊숙한 비례죠. 문학이나, 공학이나, 예술이나, 한국의 교수들은 이 틀에서 뭐든지 해요. 규모와 투자의 상관으로 보면 대단한 생산성의 공간입니다. 학자의 서재는 정숙한 사유의 공간일 것 같지만, 건축가의 서재는 풀무가 달린 공작실 같아요. 연구, 작업, 수면 등 온갖 거리가 다 일상처럼 해결되지요. 그래도 주어진 개인의 공간이라 화날 일에 분을 삭이거나, 크게 기쁠 일에 표정관리 할 필요 없이 ‘푸하하’ 거릴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또 저란 한 사람에게 10평의 공간은 의외로 심각해 질 수도 있을 겁니다.


가장 공간적인 문학, 희곡

저는 의식적으로 희곡을 즐기고 많이 읽었습니다. 희곡은 무대에 오르기를 전제로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공간적이죠. 요즈음은 새로운 창작 희곡이 쏟아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제한된 정통 연극이 대부분 레퍼토리여서 희곡 읽기와 연극 보기가 연관시키기가 쉬웠어요.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과 극장의 연극을 통합시키는 것은 문공의 일입니다. 곧 읽는다는 것은 더 복합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건축 디자인과 함께 역사와 건축비평에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건축에서 독서는 무식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궁핍의 청년시기에는 책의 시장이 궁핍했었고, 우리 사회의 지적 구조도 아주 단순했습니다. 이제 이 다원의 세계성은 더욱 복잡해지고 훨씬 분화될 것인데, 다음 세대에게 닥칠 지적 쓰나미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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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시 습관

모두 그러겠지만, 저에게 책은 전공의 지식을 위해 읽거나 재미로 읽는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전공의 지식을 위해 책을 읽으면서 그 지식을 현장화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그 책을 읽으면 좋습니다. 물론 거기서 그 원고를 쓰는 것도 그러합니다. 나의 책에는 수많은 레이블이 붙여집니다. 아마도 이것은 ‘다음에 다시 봐요!’의 의도인데, 또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 버릇이 뒤에 인용문을 찾을 때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 난 책들은 쪽지와 스티커로 너덜너덜한 모양이 되기 쉽지요.


'람세스'를 이집트에서 읽고, 루쉰의 소설은 상하이에서 읽다.

저는 책의 현장성을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소설 '람세스'는 이집트에서 읽고, 루쉰의 소설은 상하이에 가서 읽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반드시 이스탄불에 가서 읽어야 하죠. 소설 '이중설계'를 읽기 위해서는 몽셀 미쉘에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돌아다니고, 밤 시간은 책 안의 세계와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도시나 장소가 물리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됩니다. 이 방법은 장소를 아는데 아주 유효하죠. 외국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전라도 군산에 갈 때면 채만식의 소설을 들고 가야 합니다. 적당한 문학이 없다면 '택리지'라도 들고 가야 해요. 거기에서 책은 사실이 되고, 건축과 도시는 문학을 빌려 나에게 옵니다. 저에게는 책을 위한 또 한 가지 신의 혜택이 있는데, 바로 불면증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독서는 밤의 침대에서, 최소한 양적으로는, 더 많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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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집필 작업

저의 집필 작업에는 두 가지 축이 있는데, 하나는 한국 건축의 현재성을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계 건축에서 문화의 교차 현상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의 목적 때문에 '한국 현대건축의 유전자'와 '세컨드 모더니티의 건축', '통섭지도, 한국현대건축을 위한 9개의 탐침' 등이 만들어졌지요. '시간횡단, 건축으로 읽는 터키 역사'와 '남회귀선, 라틴아메리카의 문명기행'은 두 번째의 목적을 위한 결과입니다. 아마 이 두 가지 목적은 끝이 열려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계속해 나가고 싶습니다.


책은 한 개인의 문화질이다

당연히 책은 지식과 교양과 전공의 내공을 쌓기 위해 읽지만, 또한 책은 그 사람의 문화이기도 합니다. 어떤 전공에 있거나, 어떤 직업에 있거나, 하다못해 배추장사를 하면서도 책은 중요하죠. 한 개인의 문화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일이 E_Book이나 디지털 미디어에 지배되고 있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도라도 책의 육질을 버릴 수 없습니다.


교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이제 정년퇴임을 한 달 남긴 사람에게 원하는 삶, 미래, 계획, 바람, 꿈을 물어 보는 게 맞는 일일까요? 하하. 아주 거창한 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절대 자유’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것을 찾으면 다시 알려주겠습니다. 만약 그 사이사이에 여유가 있다면 건축의 역사문화를 마저 찾고 세계건축문화의 유전자지도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퇴임 후 서재로 쓰려고 오피스텔을 하나 샀는데 이게 또 10평짜리이네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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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Title Bar

 

 

 

추천 책 Cover 내이름은 빨강
오르한파묵 | 이난아 ㅣ 민음사 ㅣ 2009 | 성곡도서관 링크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두 가지 의미로 읽었습니다. 오토만 제국의 궁중화가들은 전통의 세밀화를 지고의 미학으로 알고있죠. 이 전통화에는 원근법과 음영의 묘사가 없습니다. 즉 평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서양화 기법이 궁중화가 사이에 은밀히 전해집니다. 그것은 미학적 충격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화가 사회에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야기는 추리소설처럼 전개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은 장 마다 화자가 바뀌면서 레이어를 계속 쌓아가는 다중구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준거로 보았습니다. 이 소설은 특별히 제가 터키 건축의 문화교차를 정리하는데 귀중한 단서가 되었고, 1998년 '시간 횡단, 건축으로 읽는 터키 역사'를 집필하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추천 책 Cover 슬픈 열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ㅣ 한길사 ㅣ 1999 | 성곡도서관 링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유대인이며, 20세기 초반 유럽 사회에서 인종차별에 휘둘리던 인류학자입니다. 당시 유럽 학계에 발을 못 붙인 그는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에서 교직 자리를 얻는데, 그마저 접고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는 미접촉 인종문화가 점점이 박혀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은 독충과 혹독한 기후와 허기를 견디며 아마조나스의 인류학적 해석을 캐냅니다. 그의 해석은 문화의 다원적 가치입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세계는 서구 중심의 선진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로 인류문화를 가늠합니다. 그는 세계 어느 문화도 우성과 열성은 구분될 일이 아니고 단지 문명의 종류가 여럿일 뿐이라고 전합니다. 곧 차이의 가치가 있을 뿐이죠.

이러한 이해는 저를 남미로 몰아 부치고 일 년 동안 그곳에 묶어 놓았습니다. 중남미 문화교차의 만화경, 토착과 식민문화, 미션의 모순, 체념과 낙관주의 등 대륙의 역사는 모순의 복합체 같았습니다. 그 기행자료를 가지고 2010년 '남회귀선'을 집필하였습니다.
 
추천 책 Cover 사기
사마천 | 성곡도서관 링크

요즘 다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이 역사서는 고대 전국시대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중국 고대사는 비록 삼국지연의로 친숙하지만, 너무 아득한 세계죠. 이 놀라운 한자의 기록력은 2000년의 시간을 끌어다가 우리 앞에 갖다 놓습니다.
 
추천 책 Cover 불의 기억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 따님 | 2005 | 성곡도서관 링크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사를 다큐멘터리로 정리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100%가 인용으로만 되어있습니다. 인용으로만 책을 쓰는 게, 쉬울 것 같고 편할 것 같고 게으른 일 같지만 사실 그만큼 어려운 일이 또 없습니다. 하나의 역사전개를 통찰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책은 만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아주 재밌습니다. 어떤 때는 회화적이기도 하고, 희화적이기도 하죠. 아마 내 눈물자국이 여기 여러 번 떨어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