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기획특집

[FF Magazine] 한국영화계의 거장 김기영 감독


위의 인용문은 미국의 저명한 영화이론가 크리스 베리가 김기영 감독의 영화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단서로 들어본 사례들이다. 사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 이런 류의 사례, 아니 이보다 강도가 더 센 장면들도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인(?) 이러한 장면들을 지금으로부터 50~60여 년 전에, 그것도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에 과감하게 들이밀었으니, 그의 영화를 두고 ‘김기영 표 영화’, 즉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영화라는 표식이 따라붙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그로테스크하고 사디스틱한……’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말이다.
멜로드라마나 액션영화 같은 장르에 익숙한 한국의 영화 관객들에게는 김기영 영화가 뿜어내는 기묘한 분위기의 영화가 그다지 잘 어울릴 성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실제로 김기영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 전체를 통해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이 점은 비단 영화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 문화사 전반으로 확대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마치 실제 세계를 보는 듯이 화면을 운용하는 당대의 할리우드 영화 문법과도 확연히 다르다. 확실히 그의 영화가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주류의 영화 문법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를 별난 작가주의 영화의 소산물로만 보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는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가장 잘 나가는 흥행 감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관객들 대부분이 특별한 취향과 감식안 혹은 지식으로 무장한 관객이 아닌, 아줌마 부대 혹은 고무신 관객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화는 당대에 대단한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했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그의 영화가 주는 즐거움 혹은 진가를 당대의 주 관객층이었던 중하층 여성들은 직감적으로 포착했던 데 비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뒤늦게 지적인 조명을 받고있다. 하지만 그 차이를 가지고 그를 협애한 작가주의의 테두리에 옭아매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김기영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갖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긴장은 매혹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의 영화는 스크린에 편하게 이끌리는 순응성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멜로드라마인 듯 싶으면 스릴러와 서스펜스, 호러 장르가 뒤섞이고, 사극인가 싶으면 탐정 영화의 요소가 가로지르고 뒤섞인다. 그래서 어떤 장면, 어떤 대사도 우리의 뻔한 예측을 빗겨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객은 모종의 압력을 느낀다. 원하지 않아도 집요하게 뒤따라 갈 수밖에 없는 탐정이 되어야 할 것 같은. 그런데 이러한 효과는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것이다. 그는 출연 배우들에게조차 촬영 직전까지 액션이나 감정 표현 등을 지시하는 콘티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자신이 어떤 장면을 찍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할 뿐이었다는 고백이 나왔을까. 대본을 미리 보고 ‘아,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기 식의 예측 가능성을 출연 배우에게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의 이러한 철두철미함은 그를 둘러싼 숱한 미스터리 에피소드들을 양산시키고 그의 영화 세계에 기이한 낙인을 찍게 하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그의 삶과 영화를 통틀어 보더라도 그의 영화적 철두철미한 태도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신의 시나리오집이나 영화사 간판에서부터 부인의 병원 간판이나 명함 디자인, 포스터에까지 볼 수 있는 그의 일관되고 독특한 서체는 기이함을 넘어선 오마주의 대상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로테스크하고 사디스틱한 느낌은 특히 줄거리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이를테면 ‘하녀’ 3부작(<하녀>(1960), <화녀>(1971), <화녀 ’82>(1982))도 그렇지만, <충녀>(1972)(1984년에 <육식동물>로 리메이크된다)의 줄거리는 더욱 더 엽기적이다. 본부인과 첩이 계약을 통해 남자의 시간을 12시간씩 반으로 나눠 남자를 소유하기로 하는가 하면, <고려장>에서의 식량 부족으로 부모를 산 채로 매장하는 시나리오 등이 그런 것일 게다. 하지만 <하녀>나 <충녀> 모두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영화이니, 현실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결말에서 절대로 고리타분한 해피엔딩이나 최루성 비극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상황은 관객이 혹시라도 품을 수 있는 일말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그러니 끝나고서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이치다.
긴장의 강도는 엉뚱한 데서도 요구된다. 관객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소품들에도 눈을 박아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우리 면전에 들이 내미는 시계들, 거울, 피아노, 스테인드글라스, 형형색색의 사탕 등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며,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등장하는 과장된 계단은 물론이거니와 쥐나 닭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물들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 못지않은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일상적으로 그냥 지나쳤을 법한 그 사물들이 말을 건다. 무시하지 말라고, 자신들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미술에 대한 상당한 안목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1960년대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배경과 조명에서도 ‘김기영 표 영화’다운 치밀함과 그 독특함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다가 놀라운 사운드 효과에까지 귀를 기울여 본다면, 몸 속 모든 세포를 동원해 긴장해야 할 판이다. 그 속에서는 낯익은 배우, 익숙한 소품은 더 이상 낯익은 것이 아니다. 그 낯선 낯익음의 기괴함에서 괴기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그로테스크하고 사디스틱하고 매저키스틱하고 기이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거칠 것이 없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김기영의 영화에서는 성애와 욕망, 공포, 죽음이 도처에서 반복된다. 다분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큰 주제들이다. 여기에 노동, 권력과 투쟁이 덧붙여지니 영화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근대성과 전근대성, 가부장제 질서, 이데올로기라는 주제까지 결합한다면? 보나마나 ‘볼 장 다 본 것’이다! 그만큼 거대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김기영이 거장으로 평가받는 것도, 국제적인 주목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바로 이 어려움과 관계가 있다.

사실 욕망이든 죽음이든 근대성이든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삶과 무관한 것은 없다. 문제는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가, 맥락을 갖고, 구체성을 띠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김기영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하녀’ 3부작이나 <충녀> <육식동물> 등의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뻔하다. ‘식모가 주인 남자와 배가 맞아 임신하고 주인 여자와 다툰다’는 이런 스토리는 수없이 많은 영화, 수 없이 많은 드라마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식상하게 다루어져 왔다. 식상한 것은 남녀 간의 그렇고 그런 문제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목도할 수 있는 사회역사적 산물이라는 명확한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김기영의 메스는 의사 출신 영화감독답게 환부의 근원을 놓치는 법이 없다. 눈물로 대충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정없이 들추어낸다. 피가 튀고 괴성이 나오고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김기영은 관객들이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 함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드물게 야외 촬영이 상당한 비중을 이루는 <이어도>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김기영의 영화는 창문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이 세트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얀 해골이 수북이 쌓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려장>은 거의 100%가 세트에서 이루어졌다. <하녀> 역시 대부분이 세트에서 촬영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만큼 세트임이 표가 난다는 뜻이고, 할리우드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매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관객은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에, 스크린에 함몰되지 않는다. <고려장>의 저 눈에 보이는 세트가, <화녀 ’82>에서 주인 남자가 정부의 집에서 젖병을 문 채 아기 모자를 쓰고 기저귀를 찬 모습과 같은 배우의 과장된 연기가, <충녀>에서 젖먹이 아기가 쥐를 잡아먹고 입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장면과 같은 비현실적이고 지나친 설정이, ‘아, 저건 영화지!’라는 자각을 하게 만든다. 그 순간 관객은 대체 이 상황은 뭔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된다. 영화적 상황에 거리를 두는 바로 그 순간, 하녀와 주인 남자 간의 성적 관계, 하녀(혹은 식모)와 주인 여자의 싸움, 무능한 주인 남자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부인 간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소품조차도 그것이 결코 단순한 소품이 아님을 간파하게 된다. 그때 영화는 우리 의식의 불편한 지점 안쪽을 신경질적으로 파헤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영화 안에 갇혀 있을 때다.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중산층의 계급적 욕망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남자들이 왜 그토록 한결같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곱씹어보게 된다. 한 번 더 생각해본다면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체화되어 있는 근대에 대한 악몽을 섬뜩하게 일깨운다. 군사정권, 중산층, 하층계급, 도시화, 산업화, 경제적 효용성 등으로 얽히고설킨 관계까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김기영 영화의 진정한 정치적 힘이다.
김기영 감독은 뒤늦게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그는 유신정권이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영화법을 개편하면서 물리적으로 더 이상 영화를 할 수 없는 환경으로 몰렸고, 급기야 1980년대 이후로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1990년대 들어서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PC통신을 통해 소수 마니아들에 의해 컬트영화 감독으로 재발견되고,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국내외 영화제와 평론가들에 의해 본격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평자는 한국 영화사에서 그를 뛰어넘는 사람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눈여겨 볼 것은 1960, 1970년대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었던 그가 반세기 안팎의 시간차를 건너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무신 관객에서 지식인 및 시네필리아에 이르는 계층적인 스펙트럼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기영 감독은 1955년에 <주검의 상자>를 시작으로 살아생전 3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중에서 10여 편은 유실되어 이제는 더 이상 그 진면모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어떤 영화도 고리타분한 옛날 옛적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그의 영화 세계는 시대적 장애에 갇혀 있지 않고 여전한 괴기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고개가 갸우뚱해진다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만든 그의 <하녀>와 최근 ‘칸 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바 있는 리메이크 작 <하녀>를 비교 관람해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그의 <하녀> 원작을 일반 극장에서도 상영한다니 대단한 기회이자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심지어 그의 영화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미처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발견하게 만든다.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거장의 작품은 볼수록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데, 김기영의 영화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만큼 그의 영화가 강력한 동시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향수적으로 불러내기 위한 행위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 말 걸고 있다.

전무후무한 독창적 스타일을 개척한 그의 영화에 대해 쏟아지는 최근의 폭발적인 관심은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당연한 결과로 수긍하게 된다. 이제 김기영의 영화를 보지 않고서는 한국영화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을 것 같다.
글/ 김수기(현실문화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