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그림속의 얼짱·몸짱]<6>뚱뚱한 비너스 / 이명옥(미술)겸임교수 , 사바니미술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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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2월 08일 (일) 17:42
영화 ‘레퀴엠’에는 중년 여인 사라가 날씬한 몸매를 되찾기 위해 돌팔이 의사가 처방한 마약을 복용하지만 결국, 정신적 육체적으로 파멸에 이르는 과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사라가 목숨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살을 빼려고 몸부림친 것은 오직 인생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빨간 드레스를 입기 위한 일념에서였다. 사라는 아줌마 체형을 벗고 매혹적인 몸매를 가꾸면 자신의 응달진 삶이 양지로 바뀐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모든 것이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이 개성의 시대에 유독 신체 사이즈만은 35-24-35라는 저주받은 숫자의 마법에 걸린 여자가 과연 사라 하나뿐일까.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 발트라우트 포슈는 ‘몸’이라는 책에서 전신(全身) 거울, 체중계, 사진술, 대중매체 등 4대 발명품을 날씬 병의 원흉으로 꼽고 가장 전염성이 강한 악성 병원체로 미디어를 지적했다. 모델의 황홀한 몸매가 대중매체에 등장할 때마다 집단 최면에 걸린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자연의 실패작이라 혐오하며 자학을 일삼는다. 캐나다 정신과 의사인 레오라 핀해스의 연구(1999년)에서도 미디어를 통해 슈퍼 모델의 환상적인 몸매를 접한 여성들은 극심한 열등감에 빠져 우울증을 앓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한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모델들의 완벽한 몸매는 타고 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탁월한 연출’로 만들어진 것임을 망각한 탓이다. 이런 일은 미술 분야라고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인 멜 레이모스(69)와 콜롬비아 출신의 화가 보테로(72)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화가들이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연출했는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먼저 멜 레이모스의 그림 ‘히포포타무스’(1967년)를 보자. 잘록한 허리와 탐스런 젖가슴, 쭉 빠진 각선미를 지닌 요염한 미녀가 하마 등에 올라탄 채 교태가 뚝뚝 흐르는 눈길로 관객을 유혹한다. 여인의 누드는 기적의 몸매 그 자체다. 게다가 몇 가지 교묘한 테크닉까지 구사했다. 먼저 뚱뚱함의 상징인 하마를 미녀와 한 쌍으로 묶었다. 또 하마의 거대한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나게 한 후 나긋나긋한 여인의 누드와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그 뿐인가. 섹시 미를 강조하기 위해 햇볕에 탄 팬티 자국을 엉덩이에 의도적으로 남겼으며 붓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캔버스를 매끈하게 색칠했다. 이 모든 장치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몸매야말로 흉측한 하마를 정복할 만큼 절대적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콜롬비아 화가 보테로는 ‘창문 옆의 여자’(1990년)에서 여체의 비만을 극대화하는 역 발상의 기법을 채택했다. 여인의 푸짐한 살집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내를 선명한 녹색으로 처리했으며 여체를 고무풍선처럼 한껏 부풀려 놓았다. 또 뚱뚱한 인체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각형의 침대를 소도구로 택했고, 여체를 직선의 벽면 구석에 세운 다음 열린 창문의 각진 모서리가 풍만한 허벅지를 파고드는 장면을 치밀하게 연출했다. ‘왜 비정상적일 만큼 뚱뚱한 비너스를 그리는가’란 질문에 그는 “예술이 자연을 왜곡시킨 것이 싫어서”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보테로의 일침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모델 신디 크로퍼드 같은 몸매 갖기를 열망하는 여성들을 위해 에어로빅의 여왕 제인 폰다는 이런 노하우를 공개했다. “밖에서 6시간 정도 달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 한 시간 더 러닝머신에서 뛴 다음 제자리 자전거를 탄 채 다시 45분 간 아령운동을 합니다.” 하루에 8시간이라! 강철 같은 의지는 젖혀두고라도 살림하랴, 애들 키우랴, 직장 다니랴 바쁜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이 이처럼 엄청난 시간을 몸에 투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혹 당신이 매일 2만5000달러를 버는 톱 모델이라면 또 모를까.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국민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