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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인의 귀환과 수난] 귀환하는 한인들-중국지역 / 김승일(한국학연구소)교수
[경향신문 2004-08-16 20:06]


‘탕!’. 1945년 9월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의 베이리(北黎). 찢어질 듯한 총성과 함께 일본군 대좌 미조구치(溝口) 해군 특무부장이 고꾸라졌다. 하이난다오의 조선동향회 회장인 김원식이 이 섬에 강제연행된 한인들의 귀환문제를 협의하려 했으나, 미조구치가 일본군의 귀환에만 몰두할 뿐 철저하게 외면하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당시 김원식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받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탈출, 목숨을 건졌다. 일본군에 끌려간 한인들은 해방을 맞았어도 일본군과 중국 당국에 의해 이중으로 통제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극심한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제의 잔악한 학살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불귀의 객이 된 사람도 많았다.

필자가 지난 2월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만난 묘족(苗族) 출신의 푸야론(符亞倫·89)은 60년 전, 푸른색 옷을 입은 채 2척의 배에 실려 산야(三亞)로 끌려온 1,200여명 한인들이 인간지옥에서 죽어간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보국대(朝鮮報國隊)라는 이름아래 남은 형기를 면해준다는 일제의 속임수에 이끌려 왔던 한인 죄수들이었다. 채소로 죽을 쒀 먹으며 중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은 밤이면 일본군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일본군이 한인끼리 서로 때리는 시합을 벌이게 했으며, 혹시나 약하게 때리는 자에게는 잔인한 시범을 보이면서 한인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광경을 푸야론은 언제나 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더욱 공노할 것은 패망 직후 일본군이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한인들을 모두 죽이고 암매장한 만행이었다.


8차례에 걸쳐 3,000여명이나 끌려왔던 하이난다오의 한인 중 겨우 100여명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 섬에서 자행된 학살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군대에 가서 빨래를 해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중국 푸순(撫順)으로 가 ‘위안부’가 된 박래순은 제16경비대 소속 하이커우(海口) 위안소에서 성노예의 능욕을 당해야 했다. 그는 일제 패망 후 일본군에 의해 내팽개쳐진 뒤 이국땅에서 몹쓸 병마와 설움에 시달리다가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강제연행되거나 중국땅으로 쫓겨간 한인들은 2백30여만명에 이른다. 당시 한국 인구의 10%를 점하는 엄청난 숫자다. 그러나 이들 중 해방 후 귀국한 사람은 동북지역에 산거하고 있던 한국인 80만~90만명과 베이징·상하이·톈진 등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있던 10만명 등 1백만여명에 불과하다.


중국에서의 귀환은 크게 동북지역(만주)과 내륙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한국인들이 이주를 시작한 동북지역은 가장 큰 해외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던 곳이다. 중국 내륙지역은 상하이와 베이징, 충칭 등지가 중심이 되었다. 중국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의 정세가 국공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한인들의 귀환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또다른 시련을 겪었다.


국민당은 기본적으로 한국인 귀환문제에 대해 우호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한인문제를 직접 관할하던 지방정부는 귀환을 위해 유랑하는 한인들을 사회불안의 요소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한인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견제했으며, 나아가 일제와 공산당의 밀정 내지 첩자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1946년 3월부터 9월까지 한인들이 차압당한 재산은 논과 밭, 광산, 대지 등만도 42억평에 이를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한인은 지방 당국과 토비·불량배 등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했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사례도 속출하였다.


이러한 핍박과 탄압 속에서 생활터전을 잃은 한인들은 귀환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북지역에서 귀환자 80만명 중 75%인 60만명은 걸어서도 돌아올 수 있었던 압록강 하류지역에 있는 단둥(丹東)지역을 통해 귀환하였다. 그러나 쉽게 자신의 생활근거지를 떠나지 못한 한인들은 사회질서 유지에 중점을 둔 국민당 정책에 의해 강제로 송환되기에 이르렀다. 1차 송환은 1946년 12월에 이루어졌는데, 대상은 38도선 이남이 본적인 1만5천명이었다.


이 가운데 추운 날씨와 교통편 부족으로 5분의 1에도 못미치는 2,483명만이 옌지(延吉)·창춘(長春)·선양(瀋陽) 등에 집결, 미군 배를 통해 인천·부산·목포 등지로 귀환하였다. 2차 송환도 1만여명을 대상으로 1947년 9월부터 추진할 예정이었으나, 국민당의 전세가 불리해지는 가운데 중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처럼 국민당 정부의 송환정책에 따른 귀환은 예정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10여만명에 이르는 한인들은 동북지역을 빠져나와 톈진·베이징 등지로 대피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자력으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면 한인들의 협조와 지지를 중요시한 공산당은 자신들의 지배지역에서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등 평등정책을 펼치며 한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점차 정국이 안정되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다 경제적 안정이 쉽지 않았던 한인들의 귀환신청이 증가되었다. 그러자 공산당측은 이들의 귀환에 협조했으나, 이들의 대량 귀환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북한측의 반대로 대다수 한인들은 귀환의 뜻을 접어야 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의 선조들이다.


한편 국민당 지배지역이던 내륙에 있던 10여만명의 한인들은 국민당의 이중 잣대로 인해 귀환 전까지 많은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귀환을 위한 선박과 비행기 등 수송상의 문제가 연합군측과 미군측의 비협조 및 무관심 때문에 상당히 지연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상하이·항저우·난징·우한·충칭·베이징·톈진 등이었다. 귀환 초기에는 14개의 항구를 통해 자력으로 귀환할 수 있었으나, 1946년 이후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일괄적으로 상하이로 집결시켜 선박이 구해지는 대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 기관인 한교선무단과 주화대표단 등이 중국 국민당 정부와 긴밀한 협조를 이루며 한인의 귀환을 주선하였다. 또한 상해한국교민회를 비롯한 민간단체들도 한인들의 생활 곤란을 해결하고 귀환을 추진하는 데 크게 힘을 쏟았다. 상하이의 한인 유지들이 결성한 부녀공제회는 중국 각처를 떠도는 소위 일본군 ‘위안부’ 700여명을 수용소에 모아 생활을 보호해 주면서 귀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의 전세가 공산당 쪽으로 기울던 1948년 말 한인의 귀환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김승일/국민대교수·한국학硏〉


-상해 한국교민회-


상해한국교민회는 1945년 10월1일 상하이 지역의 한인 5,000여명이 조직한 한인 자치기관이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중국 각처에서 흩어져 살던 3만여명의 한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면서 거리를 헤맸다. 그 중에는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내쫓긴 사람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 또 재산을 다 빼앗겨 알거지가 된 사람들 등 각양 각색이었다. 상해한국교민회는 급한대로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소를 마련하고 한인 보호에 노력했지만, 한인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해한국교민회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면서 정치적, 외교적 직무까지 대행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에게 ‘한국인증’을 발급하는 한편 중국측 경비사령부에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한인 보호를 위해 적극적 활동을 펴나갔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의 화남선무단 상해분단이 설치되면서 상해한국교민회는 상해분단과 힘을 합쳐 한인의 권익과 귀환에 더욱 매진하였다.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며 상하이 한인사회의 대표성을 지니던 이 단체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귀환하기 위해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홍커우공원에서 환영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중국측에서는 상해한국교민회의 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한국 정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민회를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같은 통제와 견제 속에서도 상해한국교민회는 한인들의 귀환을 위해 힘을 쏟았다. 귀환을 위해 상하이로 몰려드는 한인들의 수용문제, 귀국시 필요한 선박문제, 귀환 전까지의 생활문제 등을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할 때까지 그들과 협의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헌신 노력했던 것이다.


상해한국교민회는 1947년 하반기를 전후하여 귀환활동을 일단 완료하였으며, 이후에는 현지에 잔류한 교민의 보호에 매진하였다.